오늘은 "노동의 새벽"으로 유명한 박노해의 "가을은 짧아서"를 소개한다. 이 시를 읽고 떠오른 문구는 '역설의 미학'이다. 역설의 예로 '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의 봄',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등을 국어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노동해방의 약자인 '노해'를 필명으로 쓴 박노해의 시 세계는 다른 결로 흘러가고 있다. 그도 나이가 들었다.
시인
박노해는 27살이던 1984년, '노동의 새벽'이라는 얼굴없는 시인으로 알려져서, 학생운동 진영의 마음을 흔들었다.
대학생들은 유행처럼 책장 한 구석에 몰래 "노동의 새벽"을 꽂아두었다.
노래로도 만들어져,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불리기도 했다.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노동의 새벽-
원문
이제 '가을은 짧아서'를 보자.
가을은 짧아서
詩 / 박노해
가을은 짧아서
할 일이 많아서
해는 줄어들고
별은 길어져서
인생의 가을은
시간이 귀해서
아, 내게 시간이 더 있다면
너에게 더 짧은 편지를 썼을 텐데*
더 적게 말하고
더 깊이 만날 수 있을 텐데
가을은 짧아서
인생은 짧아서
귀한 건 시간이어서
짧은 가을 생을 길게 살기로 해서
물들어 가는
가을 나무들처럼
더 많이 비워 내고
더 깊이 성숙하고
내 인생의 결정적인 단 하나를 품고
영원의 시간을 걸어가는
짧은 가을날의
긴 마음 하나
*파스칼에게서 일부 따옴
감상
길고 짧음을 대비시킨다.
해는 줄어들고, 별은 길어진다.
여기까지는 평이하다.
그런데 이 시의 하이라이트는 이 부분이다.
아, 내게 시간이 더 있다면 / 너에게 더 짧은 편지를 썼을 텐데*
무슨 소리인가?
시간이 더 있다면, 너에게 더 '긴' 편지를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궁금증이 생긴다.
각주에는 *파스칼에게서 일부 따옴 이라고 적혀 있다. 더 궁금해진다.
이어서 시인은 그 답을 제시한다.
더 적게 말하고
더 깊이 만날 수 있을 텐데
뭔가 마음이 울린다.
더 적게 말하기, 더 깊이 만나기.
긴 편지를 쓰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오래 만나고 더 적게 말한다는 것.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역설이다.
더 적게 말하면서, 더 깊이 만나는 것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성립할 수도 있다.
염화미소(拈花微笑)를 생각하면, 적게 말하고 깊이 만나는 것도 가능하니까.
헷갈린다.
여기서 "너"는 누구일까?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역설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뒷 부분에 "내 인생의 결정적인 단 하나를 품고 영원의 시간을 걸어가는" 이라는 부분.
"너"에 대한 연시(戀詩)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너"라고 호명한 "나"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혹은 "너"로 호명한 "지난 시절"이든지...
귀한 건 시간이어서, 짧은 가을 생을 길게 살기로 해서
이 또한 역설적이다.
짧은 가을 생을 어떻게 길게 산다는 말인가.
물리적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진리에 대한 구도자적 자세라는 의지가 느껴진다.
짧은 가을 날의 긴 마음이라는 역설적 대비로 마무리한다.
사실 이 부분은 뾰족하게 다듬어졌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다.
대충 얼버무린 느낌이랄까.
박노해의 최근 시는 심장을 파고들지 못한다.
나도 늙어서 그럴 수도...예전이 좋다.
파스칼 인용 :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썼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왜 나왔을까?
If I had more time, I would have written a shorter letter
파스칼의 말 중, "내가 긴 편지를 쓴 이유는 그것을 짧게 만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오."라는 것이 명언의 변용이다.
“I have only made this letter longer because I have not had the time to make it shorter.”
— Blaise Pascal, mathematician and physicist.
원문은 다음과 같다.
Je n’ai fait celle-ci plus longue que parce que je n’ai pas eu le loisir de la faire plus courte.
- Blaise Pascal. “Lettres Provinciales” in the year 1657
짧게 쓰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말을 보고, 내 포스팅을 돌아보니 너저분하게 느껴진다.
오늘의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아래의 제 다른 글들도 한번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구독을 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2023.10.25 - [가끔 시(詩)를 읽자] - 가을무덤 - 제망매가 / 기형도 -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2023.10.15 - [가끔 시(詩)를 읽자] - [원문+감상] "오매, 단풍들것네 - 김영랑"- 누이는 누나? 동생?
2023.10.10 - [가끔 시(詩)를 읽자] - [원문+감상]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윤동주 시가 아니었다니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문화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그콘서트 2 총정리 - 코너별 출연진, 인터넷 반응, 방청신청법 (0) | 2023.11.13 |
---|---|
MBC 드라마 '열녀박씨 계약결혼뎐' 원작, 스토리, 출연자 정리 (0) | 2023.11.13 |
[시] 내가 사랑하는 계절 & 11월 - 나태주 /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3) | 2023.10.31 |
건즈앤로지스 Guns N Roses - November rain (4) | 2023.10.26 |
가을무덤 - 제망매가 / 기형도 -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3) | 2023.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