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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가을무덤 - 제망매가 / 기형도 -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by 미래진행형 202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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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스산해지고, 기분이 쓸쓸해지는 날에는 왠지 기형도 시인이 떠오른다.

기형도(1960~1989),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시인. 격동의 80년대에 자신만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서 그런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곧 서리가 내릴 것 같은 가을이니, 서리가 하얗게 덮인 누이의 무덤을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생각하며, 기형도의 "가을 무덤"을 읽어보자. 

 

1. 전문

가을 무덤-祭亡妹歌(제망매가)
- 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영하)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神經)을 앓는 중풍환자(中風病者)로 태어나 
전신(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1994)

 

2. 감상

가을날, 누이의 무덤 앞에서 술을 마시며 감정이 복받치는 느낌. 춥지만 춥지가 않다. 서리가 내리고, 풀은 듬성듬성 빠져버린 누이의 무덤을 보며, 슬픔이 점점 고조된다. 어린시절 누이와 함께 했던 기억들도 떠올린다.  '편안히 누운 누이'라는 말에 자신도 누이의 곁으로 가서 눕고 싶다는 느낌이 전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누이의 비극적 죽음이 가져온 충격, 지켜주지 못했던 후회가 평생 시인을 괴롭혔을 것이다. 

 ‘난 그날 이후 정서적으로 죽은 사람이야.’
- 기형도 -

누이가 죽은 날 이후 정서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시인. 그도 누이의 곁으로 너무 일찍 가버렸다. 안타깝다. 

 

기형도는 대체 불가능한 음유시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절친이었던 소설가 김태연의 인터뷰 중 일부다. 

“기형도의 재주 중 첫 번째는 노래였고 두 번째가 그림, 세 번째가 시였습니다. 형도의 시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장소가 어디든 형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옆 좌석에서도 입을 다물고 경청했고 끝나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으니까요. 학창 시절 후배였던 안치환이나 강산에의 노래를 듣고 ‘그렇게 지르지만 말고, 형도처럼 좀 울리는 맛이 있어야 노래지’라고 구박할 정도였어요.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도 ‘뒤풀이 장소에서 기형도의 노래를 듣는 맛에 중앙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봤다’고 하더군요. 그림도 무척 잘 그려서, 형도가 초상화를 그려준 술집에선 정말 대접이 달랐어요. 시가 제일 마지막이었죠. 그래서 제게 기형도를 한마디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대체불가능한 음유시인’이라고 답합니다.”  - 출처 : 동아일보 
 

“기형도 시의 원점은 1975년 5월 16일 누이의 죽음에서 찾아야”

시인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인한 급성뇌졸중이라는 사망 진단을 받았다. 그 후 석 달이 안 된 5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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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기형도 시의 도저한 비극성과 지독한 상실감이 주르륵 이해됐다. ‘쥐불놀이’에서 ‘사랑을 목발질하며/나는 살아왔구나’라는 구절, ‘바람은 그대 쪽으로’에서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沈默(침묵)은 언제나 이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는 구절, ‘빈집’에서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구절….
‘가을 무덤-제망매가’는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되지 못했다. 1994년 발간된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비로소 수록됐다. 놀랍게도 김현은 이를 접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시집 해설 첫 단락에서 기형도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언급하며 “?‘제망매가’의 슬픈 어조와는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고 썼다. 물론 여기서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지은 향가를 언급한 것이지만 그가 기형도의 시를 통해 그 무의식적 진실에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기형도의 시를 이해하려면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를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이유다.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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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신문

오늘의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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