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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원문+감상] 박노해, 가을은 짧아서 - 역설의 미학, 파스칼은 왜?

by 미래진행형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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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노동의 새벽"으로 유명한 박노해의 "가을은 짧아서"를 소개한다. 이 시를 읽고 떠오른 문구는 '역설의 미학'이다. 역설의 예로 '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의 봄',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등을 국어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노동해방의 약자인 '노해'를 필명으로 쓴 박노해의 시 세계는 다른 결로 흘러가고 있다. 그도 나이가 들었다. 

 

 

시인

 

1991년 사형 선고 후 - 나무위키

 

박노해는 27살이던 1984년, '노동의 새벽'이라는 얼굴없는 시인으로 알려져서, 학생운동 진영의 마음을 흔들었다.

대학생들은 유행처럼 책장 한 구석에 몰래 "노동의 새벽"을 꽂아두었다.

노래로도 만들어져,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불리기도 했다. 

초판, 노동의 새벽, 1984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노동의 새벽-

원문

이제 '가을은 짧아서'를 보자. 

가을은 짧아서
詩 / 박노해

가을은 짧아서
할 일이 많아서

해는 줄어들고
별은 길어져서

인생의 가을은
시간이 귀해서

아, 내게 시간이 더 있다면
너에게 더 짧은 편지를 썼을 텐데*

더 적게 말하고
더 깊이 만날 수 있을 텐데

가을은 짧아서
인생은 짧아서

귀한 건 시간이어서
짧은 가을 생을 길게 살기로 해서

물들어 가는
가을 나무들처럼

더 많이 비워 내고
더 깊이 성숙하고

내 인생의 결정적인 단 하나를 품고
영원의 시간을 걸어가는

짧은 가을날의 
긴 마음 하나

*파스칼에게서 일부 따옴

감상

 

길고 짧음을 대비시킨다.

해는 줄어들고, 별은 길어진다.

여기까지는 평이하다.

그런데 이 시의 하이라이트는 이 부분이다. 

 

아, 내게 시간이 더 있다면 / 너에게 더 짧은 편지를 썼을 텐데*

 

무슨 소리인가?

시간이 더 있다면, 너에게 더 '긴' 편지를 써야 하는 것 아닌가? 궁금증이 생긴다.

각주에는 *파스칼에게서 일부 따옴 이라고 적혀 있다. 더 궁금해진다. 

 

이어서 시인은 그 답을 제시한다. 

더 적게 말하고
더 깊이 만날 수 있을 텐데

뭔가 마음이 울린다.

더 적게 말하기, 더 깊이 만나기.

긴 편지를 쓰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오래 만나고 더 적게 말한다는 것.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역설이다.

더 적게 말하면서, 더 깊이 만나는 것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성립할 수도 있다. 

염화미소(拈花微笑)를 생각하면, 적게 말하고 깊이 만나는 것도 가능하니까. 

헷갈린다. 

 

여기서 "너"는 누구일까?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역설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뒷 부분에 "내 인생의 결정적인 단 하나를 품고 영원의 시간을 걸어가는" 이라는 부분. 

"너"에 대한 연시(戀詩)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너"라고 호명한 "나"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혹은 "너"로 호명한 "지난 시절"이든지...

 

귀한 건 시간이어서, 짧은 가을 생을 길게 살기로 해서

 

 

이 또한 역설적이다.

짧은 가을 생을 어떻게 길게 산다는 말인가. 

 

물리적 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진리에 대한 구도자적 자세라는 의지가 느껴진다. 

짧은 가을 날의 긴 마음이라는 역설적 대비로 마무리한다. 

 

사실 이 부분은 뾰족하게 다듬어졌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다. 

대충 얼버무린 느낌이랄까. 

 

박노해의 최근 시는 심장을 파고들지 못한다.

나도 늙어서 그럴 수도...예전이 좋다. 

 

 

노동의 새벽:박노해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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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인용 :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썼습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왜 나왔을까? 

 

If I had more time, I would have written a shorter letter

 

파스칼의 말 중, "내가 긴 편지를 쓴 이유는 그것을 짧게 만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오."라는 것이 명언의 변용이다.

“I have only made this letter longer because I have not had the time to make it shorter.”
— Blaise Pascal, mathematician and physicist.

 

원문은 다음과 같다. 


Je n’ai fait celle-ci plus longue que parce que je n’ai pas eu le loisir de la faire plus courte.

 

- Blaise Pascal.  “Lettres Provinciales” in the year 1657

 

짧게 쓰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말을 보고, 내 포스팅을 돌아보니 너저분하게 느껴진다.

 

 


 

오늘의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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